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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일상

<아내 대신 엄마가 되었습니다> 후지타 사유리

아내 대신 엄마가 되었습니다 표지 사진

 

방송인 사유리 씨를 생각하면 좀 엉뚱하고 솔직한 외국인 정도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녀가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조금 바뀌었다. '용감하고 특별한 선택을 한 싱글맘'이 추가되었다. 남들은 가지 않으려는 싱글맘의 길을 자기 발로 찾아간 사유리 씨의 에세이라는 소개글에 호기심이 동했다.

 

비혼 출산이라는 길을 걷는 나를 엄청나게 특별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 기인으로 여기는 시선이 그래서 조금은 부담스럽다. 나는 그저 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없는 미래를 그리지 못한 것이다.



분명히 엄청난 결심을 했겠지만 이런식으로도 표현이 가능하구나 싶어서 조금 놀랐다.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미래를 선택했다는 것.

사실 나는 결혼이나 출산을 한번도 내 미래에 끼워 넣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은 내 생각이다. 그런데도 나이를 먹으면서 한 번쯤은 여성으로서 가임기를 지나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남자와 폐경이 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는 다르니까. 나도 이럴진대 평범하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미래를 꿈꿔온 사람에게는 더 큰 두려움일 것이다. 자신이 그려온 미래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사유리가 죽지만 않으면 돼. 사유리만 행복하다면 아무것도 신경 안 써.”

사유리씨가 임신을 한 뒤, 아버지에게 소식을 알렸을 때의 반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느꼈지만 사유리 씨도 그 부모님도 너무나 단단한 사람들이다. 그것도 아주 놀라울 정도다.

보통 딸이 결혼도 하지 않고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다고 알리면 그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할까? 위의 반응을 할 수 있는 부모님이 얼마나 될까? 당장 나라도 저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기를 향한 내 사랑은 ‘첫눈에 반한 사랑’은 아니었다.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커진다. 매일 어떻게 이만큼이나 더 사랑할 수 있는지 놀랄 만큼, 때로는 조금 무서울 만큼 사랑이 쌓여간다.



일본도 한국도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낳은 경우 ‘친모’만 자녀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생물학적 친부임을 확인받아도 아기의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려면 친모의 인적 사항을 모른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해야 하거나 친모가 서류상 행방불명 처리되어 있어야 하고 별도의 소송을 거쳐야 하는 등 문제가 아주 복잡했다.



그동안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알 도리가 없어서, 아이에게 ‘우리 같은 가족’도 있다고 보여줄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젠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보다가 엄마와 아빠와 아기가 너무 당연하게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아서 조금 슬퍼지곤 했다.



비혼 출산 행위를 부추길 수 있다. 비혼모 가정이라는 ‘비정상적인’ 가족 형태를 정상처럼 보이도록 할 우려가 있다. 공영방송이라면 마땅히 ‘바람직한’ 가정상을 제시해야 한다. ‘건강한’ 가정이라는 가치를 해치는 결정이다.


대의라는 거창한 말은 부담스럽지만 나를 계기로 몇 사람이 조금 더 편하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내 다음에 올 사람들에게, 앞으로 젠이 살아갈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이 책에는 출산, 가족에 대한 다양한 이슈가 언급되어있다. 사유리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기를 낳고 나니 세상의 다른 아기들이 새삼 눈에 밟힌다.'라고 한다. 젠을 낳고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겪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많은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예전에 다큐에서 보았던 미혼부 가정의 출생신고에 대한 이야기도 짧게나마 들어있었다.

사유리씨는 스스로도 자신은 사회운동가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우리 사회에 좋은 방향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물결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사유리 씨의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도 미혼으로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쩌면 한부모가족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결같이 느꼈던 점이 있다. 사유리씨가 너무나 단단하고 매력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철없어 보이는 4차원 외국인에서 이 정도의 인식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필요한 것은 단 한 권의 책이었다. 아마도 젠은 행복한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생겼다.

나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문장을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그녀의 긍정적인 생각이 나에게도 영향을 주길 바란다.

나는 정자 기증자를 아빠라는 말 대신 기프트Gift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게 목숨보다 소중한 젠을 선물해준 고마운 사람. 젠에게도 같은 이름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엄마가 젠을 너무너무 만나고 싶어서 기프트의 도움을 받았다고. 젠은 기프트가 엄마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