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좋아합니다.
다른 책의 정보를 보다가 링크를 타고 알게 된 것 같기도 한데 어쩌다 이 책을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마음이 동해 같은 시리즈의 책들을 몇 권 구매했다. 그중 첫 번째는 '산책'이다.
가족들이 함께 나서는 밤산책의 기억이라. 나에게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추억이다. 잠옷 차림으로 용두산 공원 나들이를 나섰던 어느 날 밤이 아주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는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청록색 반들거리는 바지를 입었던 것 같다. 날듯 말듯한 기억을 사진으로 더듬어보는 것뿐이지만 행복했던 것 같은 시간. 그런 기억을 좀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여행지에서 느끼는 낯설은 느낌은 나만이 아니구나. 어디론가 걸음을 바쁘게 옮기며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여행자로서 서 있는 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일상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일이니까 그렇다고 여겼다. 다음날이 되면 대부분은 잊어버리는 그저 그런 일상이 아니라 며칠, 아니 몇 년이라도 기억에 남을 아주 특별한 하루. 누군가가 일상을 보내는 터전이 나에게는 유일한 추억을 남길 장소가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좋아하는 것을 하러가던 어린 시절의 길이 있었을까. 나는 까만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모두 잊어서 학교종이 땡땡땡도 칠 수 없겠지만 어린 시절에 1년 정도 피아노를 배웠다. 엄하던 선생님이었지만 같은 곡을 연습하며 하나하나 그린 사과가 10개 모이면 꼭 칭찬을 해주셨다. 피아노 학원 옆 작은 슈퍼마켓은 이사 가며 새끼 고양이를 두고 가는 바람에 내가 데려온 적도 있었다. 학원을 그만두던 날 차마 선생님께 앞으로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펑펑 울며 집으로 왔던 기억이 선하다.
'초록은 위로'라는 이 구절은 나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라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유난히 힘들었던 첫 직장에 다니던 시절, 나는 우연히 근처에 큰 식물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말임에도 근무를 하고 느지막히 길을 나선 탓에 마음에 급해 택시를 잡아탔는데, 근처라고 생각했던 길이 그렇게 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식물원은 정말로 커서 남은 오후를 모두 쏟아도 다 둘러보기 힘들 정도였는데 묘하게 그 속에서 나는 안정되어감을 느꼈다. 그 이후로 종종 힘들 때면 식물원을 찾기도하고 나무가 있는 곳에 산책하러 가기도 한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조금은 누그러들고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바닷가에서의 다양한 추억이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바다에 별 관심이 없는 어른이 되었다. 부산에 살지만 한여름 피서를 바다로 가본지는 10년정도 된 듯하다. 하지만 역시 부산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라서 그런지 며칠이라도 부산을 떠났다가 부산역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특유의 짠내를 맡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마 내 장소로 돌아온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
나도 해변을 걸으며 휴식을 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베네치아를 방문했던 날, 수많은 사람에 치여 넋이 날아가는 것 같던 날에 같이 동행했던 이가 어느 섬으로 가자고 했었다. 베니스 영화제가 치러지는 섬이었던 그곳에서 오랜 시간 별 말도 없이 해변을 걸었다.
애당초 동행이었던 사람은 전날 숙소에서 만난 낯선이였으므로 말할 거리가 많지도 않았고 이야깃거리를 찾기엔 둘 다 지쳐있었다. 하지만 보드라운 모래 위로 들썩이는 파도를 보며 해변을 걷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임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며 그렇게 휴식할 수 있었다.
나는 한번 읽은 책이나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다시 보는 것들에는 도통 집중을 하지 못하고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재밌게 본 책이나 영화도 다시는 보지 않는 편이다.(드라마나 예능은 볼 수 있으니 신기할 따름) 하지만 가끔 다시 보게 될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럴 때면 그때의 내가 표시해둔 구절, 기억에 남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러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해버린다. 그러려니 넘어갈만한 일인데도 나는 그게 못내 섭섭하다.
태어난 계절이라. 나는 늦은 가을에 태어났지만 겨울을 더 좋아하고 어려서부터 내가 겨울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아빠도 종종 나에게 '겨울아이'라는 노래를 불러주시곤 했다. '겨울에 태어나 아름다운 당신은'으로 시작하는 이 오래된 노래를 어릴 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노래조차 그립다.
더위를 심하게 타는 탓에 겨울을 더욱더 좋아하는 나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도 두꺼운 옷을 껴입은 포근함과 눈을 기다리는 마음을 사랑한다. 눈을 아직도 좋아할 수 있는 건 눈 볼 일이 별로 없는 부산사람이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른 아침 차가운 공기에 콜록이는 일을 겪어도 그 서늘한 공기의 느낌은 싫어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에 버스가 끊겨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야 했던 오래전 겨울날도, 발목보다 높이 쌓인 눈에 출근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던 어느 날의 기억도 내가 좋아하는 겨울 추억 중 하나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에 대한 로망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더 그런지 별이 잘 보이는 밤하늘이 보고 싶었다. 이제껏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중학교 시절 지리산으로 수련회를 갔을 때의 일이다. 밤늦게 야외에서 진행된 산책이었는지 단순한 이동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히 올려다 본 하늘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늘이 좁아 보이도록 빽빽하게 자리한 별들, 구름도 사라진 듯 칠흑 같던 밤이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집 뒤의 작은 마당에 있던 무화과나무가 생각난다. 지금은 모두 없어져버린 그 무화과나무들은 처음 이사 오고 몇 년간 자리를 지켰다. 열매를 맺는 계절이면 아빠가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무화과를 제법 많이 따오시곤 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으면 작은 벌레가 떨어져 간지럽다고 하시면서도 따온 무화과를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공기 좋은 시골도 아닌데 먹어도 되는 것이냐며 툴툴거리긴 했어도 하나둘 집어먹는 무화과는 꽤 달았다.
마치는 글 따위도 없이 툭 끝나버리는 글이 못내 섭섭하다. 있어도 공들여 읽는 편은 아니지만 없으니 마치 인사도 없이 가버린 친구 같다.
무엇으로의 산책이든 산책은 좋다. 겁도 많고 게으른 탓에 밤산책을 즐겨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다시 별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 아래를 걸어보고 싶다. 분명히 내 기억 속의 행복한 시간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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