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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일상

치유에 대해 생각하다 <치유의 기술> - 뮤지엄 원

이미 예매는 해뒀고 생각할 시간은 잔뜩 남아있을 때, 나는 '치유'와 '기술'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치유를 위한 기술인 걸까, 치유하는 방법에 대한 것일까? 나에게 치유라는 건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라 기술 같은 건 없을 것 같아서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뮤지엄 원 입구 사진

 

파란 화면을 얹은 입구 앞에 서자 이제야 실감이 난다. 오늘이 오픈하는 날이라는 게. 꽤 오래전에 예매해둔 것 같은데 어느새 관람할 날이 다가왔다. 시간은 빠르고 치유를 향한 길은 멀다.

 

+ 모든 작품을 다 다루는 것은 아님

 

 

예매해둔 티켓을 확인하고 입구로 들어서자 배배 꼬인 작품 하나가 나타난다. 마치 빛으로 그린 그림 같아서 움직이는 빛의 색깔을 잠시 눈으로 좇았다. 작품 설명을 읽는데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미래가 그립나요?>에서 만났던 '한물간 미래'다. 이미 지나간 미래와 사용되어버린 입장권,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상이야기] - 미래가 그립나요? - 현대모터스튜디오, F1963

 

미래가 그립나요? - 현대모터스튜디오, F1963

이번에도 한 장의 사진에 낚인 물고기는 보러 갈까 말까 망설이던 전시를 보러 가기로 한다. 왜 전시회는 다 집에서 먼 곳에서 하는지 투덜거리면서. F1963에 가는 길, 커다란 안내판이 반겨준다.

puddingluna.tistory.com

 

 

빛 속에 숨은 나뭇잎의 형상들은 당연하게도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이라는 것은 가장 흔한 치유의 소재가 아닌가 싶다. 자연을 떠올리는 순간 어딘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작가는 자연의 착취와 만들어진 시스템 속에 강요된 휴식을 이야기한다. 작가에 의해 의도된 치유가 나쁜 것일까?  치유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강요된 것이라 한들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부채처럼 접힌 화면 속에 바다가 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선명하지 못한 바다, 그것은 내가 움직임에 따라 곧 사라지고 화면에는 내가 비친다. 나는 관객이자 작품이 되어 작품과 하나가 된다.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고픈 욕망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작품을 보며 오히려 존재의 희미함을 느낀다. 나는 온전히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작품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은 움직임을 통해 곧 작품 속에서 사라진다.

 

 

온통 녹색의 공간과 그 속에 세워진 사진들. 그리고 그 속에서 초록빛을 내뿜는 글씨. IS MY BEAUTY DISTURBING? 녹색은 치유의 색. 그 안으로 들어온 관객은 치유를 느낄 수 있을까? 밤의 자연을 인공적으로 밝히는 녹색의 문장은 자연을 통한 치유를 오히려 방해하는 듯하다. 치유의 초록빛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역설일까?

 

 

큰 공간을 채우는 거대한 영상이 이 전시의 주인공처럼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한참이나 이어지는 이 영상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해야 할 것 같다.

 

 

그 옆으로 몇 개의 작은 방이 있는데 그중 하나, 들어가자마자 '그래! 이게 치유지!'를 외친 방이 있었다.(참고로 나는 강아지 인간이다.) 새끼 고양이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영상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도 상관없다. 들어오는 순간 마음의 작은 응어리 정도는 사르르 녹아버린다.

 

 

세 개의 화면을 채운 장면들은 작가가 지나온 공간들이다. 나의 과거 흔적들이 안녕하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을 가져본 사람이 있을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동네, 학교, 심지어 그때는 몹시 싫어했던 학원이나마 그것이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음이 주는 따뜻한 느낌. 추억의 장소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서운함의 반대라고 해야 할까? 그 모든 장소, 더불어 나의 추억들이 안녕하기를...오늘도 이 작품을 통해 떠올리게 된다.

 

 

하얗고 동그란 것이 야구공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웃고 있는 캐릭터다. 이름도 있단다. 만족이. 귀엽지 않은가? 저마다 브랜드가 적힌 종이가방을 들고는 한껏 웃고 있다. 이건 설명 없이도 안다. 소비를 통한 치유. 건강한 방식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방법이다. 양손에 꽉 쥔 종이백과 그 웃는 얼굴에 괜히 나도 즐거워진다.

 

 

어둡고 무성한 숲인가, 비처럼 나뭇잎이 흩날리는 나무 사이인가. 그림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에게 두려움과 편안함, 그 사이 어딘가를 자극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숲'이다. 숲은 그 존재 자체로 나에게는 치유제다. 힘든 시기에는 식물원을 방문하곤 했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 코를 편안하게 하는 숲의 냄새, 폭신한 발 밑의 느낌. 그런 것으로 위안받아본 사람이 나 말고도 더 있으리라.

 

 

흰 눈밭에 선 하얀 나무의 숲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신비롭기도 하고 우아하고 화려하기도 하다. 이것은 창작을 통해 치유받은 작가의 부산물일까? 이 나무 오브제들은 일회용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매일 마주쳤던 이웃집 나무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작품. 아, 그러고 보니 매년 꽃을 피우던 이웃집 목련을 올해는 보지 못했다. 그 집주인이 나무의 가지를 무자비하게 쳐내버렸기 때문이다. 내 나무도 아닌데 너무 아쉽고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집을 드나들 때면 곱게 핀 옆집 목련에 한 번씩 눈길을 뺏기곤 했었는데, 올해는 눈 둘 곳을 잃었다.

 

 

네 개의 액자에 바다 풍경이 담겨있다. 사람이 붐비는 해변부터 저 멀리 수평선이 담긴 것까지 액자마다 다른 바다의 일면이 담겨있다. 바다는 누구에게는 그리움이고 누군가에겐 두려움의 대상이다. 나에게는 둘 다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 선 아저씨들이 이 해변이 해운대인지 아닌지 언쟁을 벌인다. 아니, 그게 왜 중요해요?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나갈까 하는데 1층 가운데 큰 영상이 나오던 화면에 피에타가 비치고 있다. 나를 바티칸까지 가게 했던 피에타.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2층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영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관람했다. 제법 긴 길이의 영상은 흥미롭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스러운 느낌을 풍긴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빛, 유리로 만들어졌을 마리아와 예수, 천사들. 천사의 날개가 흔들리고 유리의 조각이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움직임이 없었다면 손을 모아 기도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늘, 코끼리, 등대를 안고 누운 커다란 아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웃는 얼굴들, 그리고 피에타. 영상마다 느낌도 다르고 당연히 생각하게 하는 바도 제각각이다. 하나의 마스크 낀 얼굴이 수많은 웃는 얼굴이 되어 하나씩 마스크가 지워질 때는 뭉클하기도 했다.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의 힘듦이 조금 씻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피에타. 별 움직임이 없는 짧은 영상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강렬한 부분이었다.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표정이 너무 온화해서 현실적이지 못한 그 조각의 전체적인 모양새가 너무 아름다워서, 영상 속의 작품임에도 넋을 잃었다.(검색해서 확인해보니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약간 다른 것 같다.)

 

치유의 여부는 개인적인 부분이니 차치하고, 한 번쯤 보면 좋을만한 전시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사람이 많은 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많다고 생각했지만 관람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영상을 다 보고도 감상에 2시간 정도 소요됐다. 사진도 찍고 여유 있게 본다면 2시간 반쯤 걸리지 않을까 한다.

 

 

 

 

※ 위치 및 정보

 

 

치유의 기술

2022-03-26 ~ 2023-05-07

뮤지엄 원